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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착각은 행복했었는데_

기사승인 2022.02.14  20:4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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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둥이로 태어나 몹쓸 6·25 전쟁을 위시해서 수많은 격변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질곡의 세월을 건너왔다. 가난했을 뿐 아니라 모진 세파의 아픔을 온몸으로 부딪치면서도 순탄한 배움의 기회를 누리고 사회의 양지 녘에 뿌리를 내렸었다. 돌이켜보니 서른일곱 해 동안 지성의 전당에서 젊은이들과 어울려 밀고 당기며 학문을 업으로 했다. 그 후 일터에서 물러난 지 올해 십 년째이다.

원래 타고난 천성이 어릿한 데다가 후천적인 노력 또한 신실하지 못했던 까닭에 이렇다 할 업적을 일궈 내거나 사회적으로 기여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삶을 부끄러워하거나 크게 책잡힐 행동거지도 없었다. 이렇게 장삼이사(張三李四)를 빼닮은 평범한 천성에다가 부단한 각고의 노력도 없이 밋밋하게 살면서 세류와 적당히 타협을 꾀하며 성공 운운하던 어리석음에 사로잡혔던 시절이 되레 행복했었는데.

  적지 않은 이들이 자기 직업에 대해 회의에 빠져 갈등을 겪으며 숱한 가슴앓이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내 경우는 바라던 직이었기에 첫발을 내디딘 이후 후회하거나 다른 분야를 곁눈질해 가며 게걸음을 했던 적이 없다. 하기야 기업에 뿌리내렸던 친구들보다 보수가 뒤진다는 아쉬움이 있어도 사회적 대우나 젊은이들과 함께 파고들던 학문의 길이 훨씬 매력적이었다.

  이런 연유에서 자부심과 보람을 두루 갖춘 지성의 전당을 사랑했다.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두 아이를 키우며 가정을 꾸려나가는 데 크게 부족해 허덕이거나 궁핍을 느끼지 않았다. 이는 물론 내 견해이다. 살림을 도맡았던 아내의 처지에서는 빠듯한 살림살이 무게가 얼마만큼 힘겹게 해왔는지 일일이 헤아리지 못했다.

  가정을 꾸린 지 마흔여섯 해째이다. 그동안 우리 집 재무장관은 아내였다. 그런 때문에 생활비 지출이나 저축 따위의 적바림이나 세세한 흐름에 대해서는 도통 무관심했다. 큰 탈 없이 굴러가는 가정에 대해 남들이 체면치레로 쏟아내는 솔깃한 입발림을 의심치 않고 받아들이며 중산층이라고 믿었었다.

  왜냐하면, 신혼 3년 차에 서울의 강남에 작은 아파트를 자력으로 마련했고 풍족하지 않았을지라도 월급을 꼬박꼬박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30여 년을 이렇다 할 굴곡 없이 지내다가 정년을 맞았기에 그 흔한 중산층이라고 치부해도 어처구니없이 헛된 망상은 아니라고 여겼었다. 턱없이 높고 컸던 헛된 꿈은 현실과 유리된 착각이었던가 보다.

  정년 이후 여느 퇴직자들처럼 가외 수입이 없어 전적으로 연금에 의존해 생활을 꾸려오고 있다. 일터에서 물러나 세월이 지날수록 사회적으로 대인 관계가 느슨하고 뜸해져 모든 게 시들해지면서 자연스레 거리가 생기게 마련이다.

  따라서 모임이나 대면(對面 : face to face)할 기회가 점점 줄어들면서 돈을 쓸 일이 상대적으로 적어졌다. 그런 관계로 여러 해째 연금이 동결되어도 큰 불만 없이 견뎌냈다. 나라의 경제적 여건이 어려워 모두가 분담해야 할 고통 정도로 치부했다. 내세운 바 없는 백성은 당연히 그러려니 여겼지만, 상류사회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과 전혀 딴판이었던 모양이다.

  내 딴에는 중산층이라고 여겼던 근거를 찾아 합리화시키고 싶었지만, 겉가량으로 가늠해 볼 객관적인 기준이나 잣대가 마땅치 않았다. 그래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노랫말에서 어디쯤 가고 있을까라고 읊어대던 얘기처럼 진정 "나는 경제적인 관점에서 어느 수준일까?’ 엄청 궁금했다. 이런 궁금증이 이번에 코로나 19가 팬데믹(pandemic) 현상을 보이고 나서 어렴풋이 유추해 볼 수 있었다. 망상이나 꿈에서 깨어나 엄연한 현실을 올곧게 인식하며 느껴지는 감정은 야릇했다.

  정부에서 긴급재난지원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소득 하위 70% 계층 가구에 지급하는데, 지급 기준을 올해 3월 건강보험료 납부액으로 정했다는 전언이었다. 우리 집은 지역 건강보험 가입자로서 올해 3월의 건강보험료 본인부담금이 소득 하위 70%의 기준액에 미달하여 긴급재난지원금을 지원 대상자로 판명되었다. 이 기준에서 내가 우리 사회의 중산층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실증되었다.

  처한 현실도 꿰뚫어 헤아리지 못하고 어처구니없는 처신을 해댔던 내가 하도 한심해 자괴감에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했다. 이런 나를 두고 사람들은 얼마나 많이 비웃었을까. 경제적인 맥락에서 사회적 약자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럴지라도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정신적인 부자고 싶다. 알량한 약자의 구차한 핑계이며 몸부림같이 초라하게 비칠지라도 자존감을 지키고 싶다는 이유 때문이다.

 

- 한판암

저자는 경남 마산 경남대학교에서 평생 젊은이들을 가르치다 정년 퇴임했다.

공과대학 교수와는 다소 거리가 멀어 보이는 듯하지만, 일찍이 20년여 전 수필가로 데뷔하여 어느덧 중견 수필가로도 문단에 자리하였다.

그간, 우연, 월영지의 숨결, 행복으로 초대, 절기와 습속 들춰보기, 8년의 숨가쁜 동행(2014년 세종도서 선정), 가고파의 고향 마산, 말밭 산책(2019년 문학나눔 선정 도서) 17권 여 에세이집 등을 발표했다.

강남신문 kangnamnews@hanmail.net

<저작권자 © 강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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