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경섭
올봄에 씨앗을 조금씩 사서 집 안팎 여기저기 파종하고 심었다. 씨앗을 트레이에 파종하고 물을 주니 싹이 터 나오는 것이 여간 신기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매일 아침이면 나가 아기 다루듯 분무기며 물뿌리개로 물을 주고, 아기 보듯 살며시 보듬어 살펴보고, 쓰다듬어 보기도 하고, 또 그 모종들이 이식할 만큼 자라서는 봄철 내내 꽃밭에 옮겨 심었다.
여름이 올 때까지 비가 제때 오면 걱정이 없지만, 비가 오지 않으면 나는 모종들이 말라 죽을까 봐 노심초사 고무호스를 끌고 다니며 물을 주었다. 그런 노력의 결과였나! 봄부터 여름, 가을까지 우리 집 꽃밭에는 꽃들이 피고는 지고 또 피었다. 원추리, 매발톱꽃, 부처꽃, 도라지꽃, 붓꽃, 패랭이꽃, 감자난초, 큰꿩의비름, 투구꽃, 참나리, 졸방제비꽃, 콩제비꽃, 은방울꽃, 이베리스, 꽃양귀비, 미모사, 멜란포디움, 끈끈이대나물, 가자니아, 토레니아, 초롱꽃, 붉은 아마, 브로왈리아, 아게라텀, 기생초, 종이꽃, 백일홍, 미니백일홍, 당아욱(말바), 풍접초, 구절초, 노랑데이지, 벌노랑이, 벌개미취, 개미취, 민들레, 비스카리아, 수염패랭이, 마가렛, 샤스타데이지, 말로페, 로단테, 디모르포세카, 수레국화, 톱풀, 달리아, 벌깨덩굴, 섬초롱꽃, 새깃유홍초, 비비추, 나팔꽃, 삼잎국화, 잔대, 천남성, 자주달개비, 서양장구채 등등…….
그리고 바로 옆 숲에는 저절로 자라 계절을 장식하던 배초향, 물봉선화, 양지꽃, 더덕꽃, 오미자꽃, 다래꽃, 망초꽃, 쑥부쟁이, 엉겅퀴, 미나리냉이, 고광나무, 야광나무 등등 다 셀 수가 없다. 가을이 가까워져 오니 하는 일이 생겼다. 처음에 꽃씨를 사서 심을 때 종류마다 약 2~30알씩 사다 심었는데 그 꽃씨들이 불어나 그때에 비하면 엄청난 양의 꽃씨들을 수확하고 있으니, 마치 갑자기 부자가 된 듯한 뿌듯함을 숨길 수 없다. 꽃씨들을 채취하면서 꽃을 바라볼 때와는 다른 감흥이 있다. 꽃이 질 때는 그 추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화려함의 극치랄 수 있는 꽃의 전성기는 아름다운 색깔도 색깔이지만 파릇한 젊음이 더 미를 발하게 한다. 그러다 꽃잎이 시들고 한잎 두잎 떨어지고 말라버릴 때는 그 추함이란 마치 죽음을 앞둔 인간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꽃은 그 추함 끝의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달아놓고 꽃잎은 말라비틀어진 채로 바람에 흩어져 사라진다. 여러 종류의 꽃씨를 채취하면서 나는 신비함에 몸을 떨었다. 미처 알지 못했던 번식을 위한 갖가지 방식들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꽃들은 각각의 모양과 방법으로 씨앗을 보존했다가 누구의 손에 닿을세라 터뜨려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뜨리거나, 또는 새에게 먹혀 멀리 옮겨 똥을 싸게 하거나, 날개를 달아 바람에 날아가거나 아니면 지나다니는 사람이나 짐승의 몸에 붙어 옮겨가거나 한다. 씨앗들은 그래서 자기들의 번식방법에 최적화해서 씨방을 만들고, 날개도 달고, 크기도 어떤 것은 먼지같이 작고, 어떤 것은 좁쌀알만 한 것도 있고, 콩알만 한 것도 있고, 갈고리 같은 모양의 씨앗도 있다. 그 작은 씨앗이 싹을 틔우고, 이런저런 모양의 줄기를 키우고, 잎을 만들고, 꽃을 피워 다시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씨를 만들고 끊임없이 세대를 반복한다.
그 작은 씨앗 하나가 땅에 떨어져 자라서 수십 수백 배로 불어 후손을 퍼뜨린다. 그 작은 씨앗 하나에 모든 정보를 간직하여 형질을 이어가면서 말이다. 그리고 자연을 장식하고, 에너지를 주고받고, 생명을 유지하도록 돕고 받는다. 씨앗은 모든 생명의 근원을 담고 있다. 그리하여 세대를 이어가기 위하여 끊임없이 씨앗을 생산한다. 그것이 우주의 섭리이고 자연의 법칙이며 신비함이다. 인간의 씨앗은 무엇일까? 물론 인간도 씨앗이 있어 후손을 낳고 형질을 받은 자식이 인류의 세대를 이어간다.
그러나 나는 그런 생물학적인 씨앗이 인간의 진정한 씨앗이라고 보지 않는다. 인간도 식물들과 같이 자연의 산물이고 반드시 죽어야 하는 한계를 가진 피조물이지만 식물의 씨앗이 하는 일과는 다른 인간의 씨앗이 하는 일이 있다. 인간은 정신의 산물을 끊임없이 생산해낸다. 기록이 그렇고, 몸으로 체득하여 후손에 전해주는 문화의 경험이 그렇다. 그러한 기록과 문화는 수없이 변주하여 다양한 정보를 축적하고 새로운 씨앗을 준비한다. 바로 인간의 씨앗은 끊임없이 생산해내는 이러한 정신의 산물이다. 그리하여 그것이 후세에 전하여 인간세계를 보존한다고 믿는다.
프로필
소설가
장편소설
『종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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