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어떤 감정 상태는 보여주는 몸짓, 표정만이 그대로 드러나는 건 아니다. 다른 형상과 상태로도 충분히 보여준다. 물론 그것은 그 행위를 하는 사람에 의해서 작용하는 것이지만, 그리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연 상태의 현상일 뿐이지만 목격하는 사람은 충분히 그 감정 상태를 읽어낼 수 있다.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이냐 하면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것은 밥을 짓는 연기일 수도 있고, 허드레로 때는 군불의 연기일 수도 있다. 어렸을 적에 나는 굴뚝에서 변화하며 피어오르는 연기를많이 보고 자랐다.
농촌이라 기름보일러는 언감생심이고 연탄도 피울 수 없던 시절에 연료라고는 푸나무 말린 것이나 생솔
가지, 볏짚이 전부였다. 그런 것으로 불을 지펴 밥을 짓고 온돌을 데웠다. 그런 광경은 일상으로 이루어졌다. 이른 아침이나 해질 녘이면 그런 불길이 초가지붕 옆에 기대선 굴뚝에서 하늘하늘 피어올랐다. 그것은 때로 지붕 위로 뻗어오른 박 덩굴이 하얗게 꽃을 피워 박 덩이를 매달고 있을 때처럼 정겨움을 연출했다.
5, 60년대, 옹기종기 모인 시골은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냇내로 코끝이 맵기는 했어도 싫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느 집에서 청솔가지라도 지필 때는 매캐한 연기가 온 동네를 뒤덮어서 시야가 흐려지고 호흡이 곤란해질 때도 있었다.
여기서 잠깐. 우리 고유의 아궁이와 굴뚝 문화를 더듬어 본다. 문헌에 보면 이것은 온돌문화와 관계가 있는데 역사는 기원전 4세기까지 거슬러 오른다. 고조선의 옥저 시대부터 아궁이를 짓고 구들을 놓았으며 굴뚝을 세웠다고 한다. 놀라운 일이다. 우리의 굴뚝은 5, 60년대만 해도 대부분 가정집이소박 단순했다. 미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어 단지 불길이 다른 곳으로 옮겨 붙지 않고 연돌에서 잘 빠져나가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렇다 보니 모양은 토방 쪽에 봉긋하게 흙더미를 쌓아 콧구멍처럼 빠끔히 뚫어 그 위
에 삿갓을 걸쳐놓거나, 아니면 널빤지를 대충 이어붙이고 함석을 말아 세우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이러한 광경이 조선말 한국을 방문한 어느 영국인의눈에는 무척 신기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그는 고국에 돌아가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는데 ‘코리아의 집들은 굴뚝이 신비하여 방에 불은 침상 밑에다 불을 피우고 굴뚝은 땅에다 구멍을 뚫었더라.’ 했다.
아무튼 그런 역사 때문일까. 그러한 온돌문화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일찍부터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도 사람의 감정들을 읽어냈다. 피어오르는 연기는 색깔 자체도 다른데 그것을 보고 이심전심 마음을 읽었다. 나는 그러한 감정변화를 어머니를 통해서 직접 목격한 적이 있었다. 눈물 나도록 서러운 날은 복받치는 슬픔, 정한의 심회를 일부러 생솔가지를 피워서 매캐한 냄새로 가리셨던 것이다.
손등으로 쓱 훔치는 눈물은 실인즉슨 매캐한 냇내로인한 것이 아니고 참을 수 없는 당신의 서러운 눈물이었다. 어려서는 그것을 몰랐지만 내가 사춘기를 지나면서 눈치 채게 되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 집은 생때같은 누나가 죽은데 이어 병석에 계시던 아버지마저 돌아가셔서 어머니의 짐이 너무 무거웠다. 나와 동생은 아직 어렸고 힘이 되어 드리지 못한 때였다. 그러던 때 나는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린 적이 있었다. 학교 주관으로 졸업생 대상 서울 박람회를 가는 계획이 섰는데 가정 형편으로는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지만 꼭 가보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한마을에 사는 친구 두 명은 이미 신청해놓고 있어서 무척 부러웠다.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머니를 졸랐다. 돌아온 대답이 단칼이었다. “소갈머리 없는 놈아, 니 아버지 병원비도 못 대는데, 가긴 어딜 간다고 그러냐?” 그 말을 듣고 반항을 하고 말았다. 등교 뭐고 작파할 작정으로 방문을 걸어 잠갔다. 그러고 있다가 다시 뛰어나와서 소리 소문 없이 마을 뒤대밭으로 숨어들어 버렸다. 애간장을 녹게 만들겠다는 심사였다. 막말하듯 나무라는 것이 너무 서러웠다. 그럴 때는 좀 좋은 말을 할 수도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보아라. 우리 형편이 어디 그리되느냐. 못 보내주어서 미안하다.
그러면 될 것이 아닌가. 대밭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버티고 있었다. 눈에서는 하염없이 서러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때였다. 마침내 해가 지고, 들일을 나간 사람들도 집으로 돌아오는 시각, “병일아- 병일아”하고 어머니와 누나가 번갈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못 들은 척하며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수록 부아를 내어 ‘애를 좀 태워보시지’하고 고
집을 부렸다. 그런데, 웬일인가. 우리 집을 내려다보니 갑자기 굴뚝에서 시커먼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연기의 의미를 알기에 마음이 무너졌다. 저것은 어머니가 눈물 날 때 하시는 행동이 아닌가.
나는 바로 농성을 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보니 어머니는 늘 하시는 대로 부엌에서 무릎 세우고 생솔가 지를 지피고 계셨다.
“엄니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게” 뒤로 돌아서서 어머니의 어깨를 감쌌다. 슬쩍 어머니의 눈을 보니 많이 충혈되어있었다. 내가 그렇게까지 한 것은 부당한 학교의 처사도 있었다. 담임선생님의 “수학여행 가지 않는 학생은 계속 학교에 나와서 운동장 잡초 뽑아야 한다고 억장이 무너지는 말을 해서였다.
그런 일로 하여 나는 굴뚝의 검은 연기를 잊지 못한다. 생각하면 내 어린 날의 가장 가슴을 아프게 하는
서러운 추억의 단상이다. (2002)
임병식
1989 한국수필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저서(수필집): ‘지난세월 한 허리를’, ‘방패연’
‘빈들의 향기, 백비’, ‘아내의 저금통’ 선집: ‘왕거미 집을 보면서’
‘오직 수필하나 붙들고’ 수필 작법서: ‘수필쓰기 핵심’
태마수필집: ‘수석이야기’
80년대 작가 6인 수필집 ‘여섯 빛깔 숲으로의 초대’
전남문학상. 한국수필문학상 . 한국문협작가상 수상
중학교 국어교과서(2-1)에 작품 ‘문을 밀까, 두드릴까’ 수록(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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