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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이 밤에, 나는 눈을 밟는다 - 이승애

기사승인 2026.01.15  15:3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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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밤에, 나는 눈을 밟는다 - 이승애

 내가 왜 겨울밤에 길을 나섰을까.
입고 나온 얇은 외투 깃을 올린다. 목도리를 하고 나왔으면 따뜻하지 않았을까. 눈이 쌓인 곳을 밟을 때마다 마음이 춥다. 나는 갈 곳을 정하지 않는다. 저 멀리 은행나무들이 가지마다 눈을 받쳐 든 채 서 있다. 자동차들도 멈춘 지 오래다. 나도 잠시 멈춘 눈발처럼 서서 청승맞은 겨울밤 외출일까 생각해 본다. 긴 겨울밤, 잠을 좀 늦게 자도 좋을 듯하다. 호주머니 속에 넣은 두 손이 더 이상 감각이 없다. 그래도 걸어가길 포기하지 않는다.

어떤 어르신이 걸어가다 말고 희뜩희뜩 뒤돌아 나를 바라본다. 그러다 몸을 돌려 소리친다.
“처자! 이 겨울밤에 어디를 그렇게 급히 가시오?”
  ‘…….’
몸을 움츠린다. 목덜미가 차가움을 견디지 못한다. 외투의 깃을 잡아당겨 목을 감싸보지만 풀려서 나풀거리기 일쑤다. 그냥 내버려 둔다. 나이를 먹어 가면서 목도리를 걸쳐본 게 언제였을까. 

어릴 적 목에 둘렀던 목도리가 그립다. 털실로 듬성듬성 짜낸 곳에 나비 천 조각이 붙은 목도리였다. 그 목도리는 겨울이 지나도록 친구들이 과자와 바꾸자고 졸라댔다. 어느 겨울날이었다. 여객선을 타고 섬으로 가고 있을 때였다. 목도리를 풀어 갈매기를 향해 흔들었다. 그러다 그만 목도리는 여객선이 품어내는 포말 속으로 따라 들어갔다. 참으로 많이 울었다. 

눈발은 그칠 줄 모를 기세다. 내 머리카락에 달라붙어 기어이 함께 가겠다고 고집을 피운다. 겨울밤, 이렇게 좋은 동행이 또 있을까. 저 멀리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길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린다. 소름이 돋는다. 급히 왼쪽으로 발길을 돌려 환한 불빛을 향해 걷는다. 사람들이 길을 가득 채운 밤길이다. 눈발은 더욱 폴폴 내리건만 이 밤, 사람들은 즐겁기만 하다. 사람들이 감고 있는 목도리를 유심히 올려다본다. 하얀색, 빨강, 초록 그리고 또 검은색이다. 

환하게 불을 밝힌 어느 옷가게 앞에서 발길을 멈춘다. 마네킹 옆에 놓여 있는 군청색 목도리를 가만히 내려다본다. 마네킹이 입고 있는 옷과 잘 어울린다. 

맞다. 몇 해 전 겨울이었을까. 

나는 군청색 목도리를 딱 한 번 목에 두른 적이 있다. 키가 작은 그 사람은 군청색 목도리를 하고 왔다. 나는 그 사람과 나란히 걷다가 자주 목도리를 올려다봤다. 카페에서도 목도리를 벗지 않았던 그 사람. 커피를 마실 때마다 목이 더 따뜻하게 보였다. 목도리에 가려진 그 사람의 둥근 턱이 자꾸 보고 싶었다. 어쩌다 그 사람이 손으로 목도리를 고쳐 맬 때면 풋풋함까지 느꼈다.

커피숍을 나설 때였다. 그 사람은 군청색 목도리를 풀어내 목에 둘러 주었다. 선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을 잊지 말라는 듯 목도리까지 고쳐 매어줬다. 나는 목도리를 매고 해변을 걸었다. 언덕에 서서 노을이 지는 풍경도 바라보았다. 겨울바람이 지나가는 숲에서 그를 생각하며 목도리를 풀어 만져보았다.

지금 환희 불 밝히고 있는 옷가게 주인은 목도리를 좋아하나 보다. 해마다 빠뜨리지 않고 군청색 목도리를 진열해 둔다. 그런데 이번엔 꽃무늬 목도리 하나가 곁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두 목도리는 꼭 부부처럼 다정하게 보인다.

내 옷장 속에 걸어둔 군청색 목도리를 떠올린다. 옷가게에 놓여 있는 목도리와 꼭 닮았다. 문득 군청색 목도리를 선물한 그 사람을 떠 올린다. 전화를 걸어 볼까 망설이다가 옷가게 안을 더 보기로 한다. 저렇게 나란히 놓여 있는 목도리는 누가 사 갈까. 어느 다정한 부부가 손을 맞잡고 와서 서로의 목에 걸쳐주며 사 가는 걸까. 고개를 든다. 몸을 돌려 길가에 서 있는 후박나무를 바라본다. 그 사람처럼 키가 작은 후박나무는 잎마다 설핏설핏 하얀 눈을 올려두고 있다. 잎들은 겨울바람을 맞아 군청색 목도리를 두른 것처럼 변해 있다.

그만 집으로 돌아간다.

중요한 일을 끝마친 사람처럼 집을 향해 씩씩하게 걷는다. 하지만 신발에 눈이 달라붙어서일까. 발길은 자꾸 터덜거리기만 한다. 택시 한 대가 내 앞에 멈춘다. 두 손을 잡은 부부가 꼭 닮은 빨강 목도리를 두른 채 내린다. 그 부부를 바라보다 괜히 눈물을 흘린다.
  이젠 한쪽 발을 다친 산짐승처럼 눈길을 걷는다. 그러고는 이별 하나를 기억해 내고 울컥 울음을 삼킨다. 두 어깨와 발등이 시리다. 아픔을 그냥 아픈 데로 내버려 둔다. 이 겨울밤이 지나면 없어지겠지. 나도 이젠 이별한 일에 정을 줘봐야겠다고 마음을 다독인다.

집을 몇 걸음 남겨두고 멈춘다. 길고양이 한 마리가 나보다 먼저 아파트 출입구 문 안으로 들어선다. 문을 애써 좀 더 넓게 벌려둔다. 방으로 들어가 얼어붙은 몸을 빨리 녹여야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왜 계속 눈발이 날리는 겨울밤을 바라보며 서 있는 걸까.

문득, 가까운 거리와 좁은 공간, 먼 거리와 넓은 공간을 생각한다. 그 넓은 공간에도 눈은 가득 쌓이겠지. 괜히 발로 눈을 한 번 걷어찬다. 눈은 겨울밤을 잠들게 하고 나는 내 마음을 잠들지 못하게 한다.

이승애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 작품발표: <에세이21>
<에세이스트> <휴먼메신저> <좋은 수필><선수필> 등 
동인지 발간: <수필여백> <동부수필>
현재: 동화, 동시, 소설을 함께 집필 중 

강남신문 kangnam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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